※ 이 곳에 게재된 글은 구름 이경숙님의 해설과 의견임을 밝혀 둡니다.
□ 도덕경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無名天地之時, 有名萬物之母,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故常無慾以觀其妙, 常有慾以觀其僥
고상무욕이관기묘, 상유욕이관기요
此兩者同, 出而異名,
차양자동, 출이이명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동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
도는 이름을 도라고 해도 좋겠지만 그 이름이 꼭(항상) 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이름으로 (어떤 것의)이름을 삼을 수는 있지만 꼭(항상) 그 이름이라야 하는 것 은
아니지 않은가?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천지의 시작이니 따질 수 없고 (우리가)이름을 붙이면 만물의
모태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름을 붙이기 전(도의 이전)에는 (천지지시의) 묘함을
보아야 하지만 <※묘함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을 붙인 후(도의 이후)에야 그것의 요(실상계의 모습)를 파악할 수 있느니라.
이 두 가지는 똑같은 것인데 다르게 보이는 것은 그 이름뿐이니 (도 이전의 세계와 도
이후의 세계가)검기는 마찬가지여서 이것도 검고 저것도 검은 것이니 <도와 도 이전의
무엇은 같은 것 이니라> 도는 모든 묘함이 나오는 문이니(지금부터 그것을 말하려
하느니라)
<도덕경 제1장>
제1장의 첫 문장은 이런 소리로 시작한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도덕경>의 첫줄은 불과 여섯 글자지만 <도덕경> 전체 5천 글자를 관통하는 대단히
중요한 문장이다. 이 문장을 올바르게 읽지 못하면 무슨 소리를 하는지 결코 알 수가
없다. 사람이 책을 쓸 때 가장 고심하는 것이 첫 줄 첫 마디다. '가(可)'자는 '무엇을
할 수 있다. 해도 좋다. 가하다'는 의미를 가진 글자다. '도가도(道可道)'라는 말은 ‘
도를 도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비상도(非常道)'는 '하지만 언제나
도라고 할 필요는 없다'가 된다.
즉 '도를 도라고 불러도 좋지만 꼭 도라고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다.
이 첫 문장이 지금부터 설명하려고 하는 무엇에 대해서 이름을'도(道)'라고 붙인다는
것을 말함과 동시에 자기가 지금부터 그것의 이름을 '도(道)라고 하기는 하지만 꼭
그것의 이름이 '도(道)'라야 만 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후대의 엉터리
학자들이 그 말을 못 알아먹고 2천년 동안 헛소리만 한거다. 이름을 '깨달음'이라 해도
좋고, '섭리'라 해도 좋고, '법칙'이라 해도 좋다는 말이다. 그냥 이름을 붙이다 보니
'도(道)'라 했을 뿐이니 이름에 무슨 심오한 뜻이 있지 않은가 고민하지 말라는 친절한
설명이다. <도덕경>의 제1장은 이름에 대한 설명이다. 불교가 동양 정신의 거대한
기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현장의 탁월한 한역 때문이다.
현장은 범어의 '니르바나'를 의역하는 우매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냥 소리나는 대로
'열반'이라고 음역을 한 것이다. 이게 위대한 번역이다. 열반이란 말에는 아무런 뜻이
없다. 그저 이름이 열반일 뿐이다. 열반이란 이름에 어떤 뜻을 담으면 그건 이미 열반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그것을 염려하여 첫머리에 저 말을 써놓은 것이다. '도라는 것은
그저 이름일 뿐이고 그것(이름)은 꼭 도가 아니어도 무방하다.'라고.
'名可名, 非常名 (명가명, 비상명)'이란 다음 구절은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를 부연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어떤)이름으로 이름을 삼을 수는 있지만, 반드시(꼭)
그 이름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사과나 애플이나 능금이나 이름은
어떻게 붙이던 그 가르치는 대상이 하나의 약속으로 받아들여지면 좋지 않은가라는
말인 것이다. 다음 구절을 확인하자.
無名天地之時, 有名萬物之母(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앞서 말했듯이 제1장은 '도라는 이름'에 대한 설명이다.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때는
천지의 시작이고, (도라는)이름을 붙이고 보면 이것은 만물의 어머니가 되는 무엇이다’
라는 말이다. 바로 도라는 이름을 붙여 설명하려고 하는 그 무엇은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그냥 천지의 시작이니 언급할 이유가 없고, 도라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부터는
만물의 어머니로서 설명이 가능해진다.
고로 어쩔 수 없이 (도라는)이름을 붙이게 되었노라. 하고 작명의 동기와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름을 붙이던 안 붙이던 우주는 존재하는 것이지만 '우주'라는 이름을
붙여놓기 전에는 우리는 '우주'에 대해서 논할 수가 없게 된다. 우리가 '우주'라고 부
르는 어떤 것이 이 세상의 근본 공간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인식 세계에 편입되는 것
은 이름을 가지게 되는 순간부터이다.
도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름을 붙이기 전의 무엇은 천지의 시작이니 따지기
어렵고, 도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야 만물의 모태로서 하나의 인식 대상이 되고 설명이
가능해진다고 말하는 것인데 이 어렵고 난해한 철학적 서술을 불과 스물네 글자로
해치워 버린 표현법은 실로 놀라운 바다. 문자 발명 이후에 인류의 기록 중에 여기에
견줄만한 것은 <천부경> 하나뿐이다. 그리고 이런 까무러칠만한 철학적 사변과 기록이
가능한 것은 오직 한자라는 문자의 위력이다.
그 어떤 문자도 이런 괴력을 나타내지 못한다. 천지지시(天地之時)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고 철학적 사변의 범주가 아니다. 그러나 만물지모(萬物之母)는 언어로 설명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무엇이 된다. 그 경계가 바로 무명(無名)과 유명(有名)인 것이다.
그 어떤 초월적이고 불가사의하며 전세계(前世界)적인 대상일지라도 우리는 이름만
붙이고 나면 그때부터 사유로 다룰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음이다. 우주의
이전, 태초의 태초, 빅뱅 이전의 세계도 '무극'이라던가 '태극'이라던가 물리학적 용
어로 '우주알'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이름만 붙이면 일단 언어적 표현의 대상물이 되고
언어의 범주에 포함되면 인식과 사유의 대상물이 된다는 철학적 통찰의 압축이다.
다음 구절을 보자.
故 常無慾以觀其妙, 常有慾以觀其僥 (고 상무욕이관기묘, 상유욕이관기요)
저 '요'자는 '지름길, 샛길 요'자다. '돌 요'로도 쓰인다. 우리가 '요행을 바란다'는
말을 쓸 때 저 '요' 자를 쓴다. 글자의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주 고대에는 '변방의
요새'를 뜻하기도 했다. 이 구절에 쓰인 '욕(慾)'이라는 글자의 뜻을 생각해 보자. 이름
(名) 이야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욕(慾)이란 글자가 튀어 나오냐. 욕(慾)은 '하고 싶어
하다'는 뜻을 가진 글자다.
무욕(無慾)은 당근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 되겠다. 그렇다면 위의 문장에서 무엇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냐를 생각해야 한다. 욕(慾)'의 목적어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이름(名)이다. 그래서 '고상무욕(故常無慾)'은 '꼭(굳이) (도의)이름을
붙이고자 하지 않으면'하는 뜻이다. '이관기묘(以觀其妙)' 이 말은 '그 (도의) 묘(妙)를
볼 것이고'로 해석하면 된다.
이어서 역하면 '도에 이름을 꼭 붙이고자 하지 않으면 도의 묘함을 볼 것이고'가
되겠다. 앞에서 무엇이라고 했지? 무명이면 천지지시라고 했으니까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천지지시의 묘를 보게 된다는 말이다. 다음 문장의 뜻은 자연히 이와 같아진다.
상유욕(常有慾), 즉 '도에 굳이 이름을 붙이고자 하면 그 요(僥)를 볼 것이다.' 두 문
장을 연결해서 주해를 달아 읽어보자.'굳이 도에 이름을 붙이고자 하지 않으면 (천지
지시의) 묘를 볼 것이고, 이름을 붙이고자 하면 (만물지묘)의 요(僥)를 보게 된다'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묘(妙)와 요(僥)의 의미가 무엇이냐이다. 무엇일까? 노자는 무엇을
묘라 하고 무엇을 요라 했을까? 그 것은 다음 구절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此兩者同, 出而異名 (차양자동, 출이이명)
한자는 소리문자가 아닌 뜻글자이기 때문에 말을 소리나는 대로 옮겨적는 기능이
없다. 그래서 조사, 접속사, 관계사 등이 부족하고 띄워 쓰기, 어순 등의 문법도 명확
하지가 않다. 물론 옛날로 거슬러갈 수록 그런 것은 더욱 심하다. 시대는 후주 시대로
소위 말하는 춘추시대로 공자와 동시대이다. 영어가 오늘날의 영어일 수 있는 것은 ‘
세익스피어' 때문인 것처럼 한자가 오늘의 한자일 수 있는 데는 공자의 공이 지극히
크다. 공자가 사용한 문장의 구사법을 '춘추필법'이라 하는데 이것은 그 내용만이 아
니라 한자를 가지고 문장을 기록하는 방법론의 확립이라는 측면에서 대단한 의의를
가진다. 이 말은 다시 말해 공자 이전에는 한자의 기록법이 중구난방이었다는 이야기
이기도 하다.
우리가 <도덕경>을 볼 때에 그 해석에 고심하게 되는 것도 한자 기록의 규칙, 즉
문법이 확립되고 통일되기 전의 기록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자 이전의 저작물
들은 글을 쓴 개인이 자기 나름대로의 필법을 가지고 썼다. 검인정 교과서의 문법이
없던 시대의 기록인 <도덕경>을 읽으려고 하면 우리는 노자란 사람의 필법을 먼저
살펴야 하고 그가 주로 사용하는 어순과 글 버릇을 파악하지 않으면 오역이 나오기
쉽다. 한자 실력만 믿고 또는 옥편 한권 들고 앉아서 해석해 보겠다고 덤비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 원문의 내용이 문자로서와 동시에 심안으로서 읽혀져야 올바른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측면은 인쇄술이 없어서 일일이 필사해서 책을 만들었던
고대에는 책을 아예 외워버리는 암송이 공부하는 방법이었고, 일부의 경전은 쉬운
암송을 위하여 소리나는 대로 읽을 때의 리듬과 가락을 염두에 두고 적은 글들이 많
다는 것이다.
<불경>도 암송시에 리듬과 가락이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는 일종의 산문시이다.
<도덕경>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도교는 중이 독경을 하듯이 <도덕경>을 가지고 노래
를 부른다. <도덕경>의 독경 을 들어보면 불경 못지않게 구성지고 듣기 좋은 가락이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춘향전'이나 '심청전'같은 옛 소설들도 마찬가지로 가락을 염
두에 두고 쓰여진 것들이다. 그래서 판소리로 부를 때 자연스럽게 리듬이 생기고 가
락이 이어지게 된다. 이와 같은 음악적 효과를 위해서 문장의 이해에 도움이 될 조사류를
생략하거나 어순을 바꾸는 일은 흔히 있는 것이고 이것이 오히려 문장을 구속하기도
한다.
문장으로서의 한문은 띄워 쓰기가 없지만 읽을 때는 오히려 정확하고 규칙적인 띄
움을 사용한다. 그래서 만약 여덜 글자로 이루어진 문장이라면 전후 네글자로 둘로
갈라지지 세 글자, 다섯 글자, 혹은 여섯 글자 두 글자 식으로 문장을 만들지 않는다.
만약 앞의 네글자가 '◎◎◎◎'이면, 뒤의 네글자도 '◎◎◎◎'가 되고
앞부분이 '◎◎◎◎'이면 뒤도 '◎◎◎◎'이 되도록 문장을 틀에 맞추게 된다는 것이다.
노자는 결벽증이 있는지 자기 글 속에 고유한 글 버릇으로서 이런 규칙성을 대단히
철저하게 준수하고 있다. 이런 점은 우리가 글 의도를 유추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此兩者同, 出而異名(차양자동, 출이이명)’
이란 문장을 해석할 때 우선 이 문장의 구조를 살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차
양자동(此兩者同'이란 앞부분을 띄워 쓰면 '차양자동'이 된다. 즉 '이 두가지(차양자)
는 같다(동)'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뒷부분도 같은 구조로 띄워 읽으면 정확한 의도가
나온다. '출이이명'이 되는 것이다. 즉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출이이) 이름(명)이다'라
는 문장이다. 이것을 '출이 이명'으로 읽으면 '다른 이름(이명)으로 나온 것(출이)이다
'라는 의미가 다른 글이 되어 버린다.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이름이다'와 '다른 이름
으로 나온 것이다'는 비슷해 보이지만 의미가 사뭇 다른 것이다. 후자를 택하게 되면
앞에 나온 내용들과 논리적으로 연결이 안되게 되는 것이다. 앞부분에서 이야기 해
왔던 것은 도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와, 이름을 붙이고 안붙이는 것의 차이에 대한
철학적 설명이었다.
무명(無名)이냐 유명(有名)'이냐 즉 이름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 말해온 것이지,
이름이 같으냐 다르냐를 말해온 것이 아니다. 천지지시와 만물지모의 차이는 이름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이름이 있고 없고의 차이이다. 묘와 요도 마찬가지로 이름을 붙여
부를 때와 이름이 없어 부를 수 없을 때의 차이이다. 따라서 저 문장의 해석은 다음
과 같이 되어야 정확한 것이 된다. '저 두 가지는 같은 것인데, 차이가 나는 것은 이
름이다(있느냐 없느냐)'보고 있듯이 글은 건너뛰거나 난데없이 엉뚱한 글이 하나씩
끼여 들거나 논리가 엉뚱한 곳으로 튀거나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 되어서
물처럼 끊기지 않고 흐르는 사상의 강이다. 다음 구절을 보자.
同謂之玄, 玄之又玄 (동위지현, 현지우현)
'현(玄)'은 '검을 현'이다. 그러나 검은 색을 가르키는 '흑(黑)'자와는 쓰임이 다르다.
천자문의 첫 글자요, 천지현황(天地玄黃)이란 말처럼 하늘의 색이고, 신비스러운 궁
창의 색이다. 이것을 '가물한 색깔'이라고 표현해서 안 될 것은 없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표현이 아니라 내용이다. '동위지현(同謂之玄)'을 직역하면 '검은 것으로서 같다
'는 뜻이다. 바꾸어 표현하면 '검기는 마찬가지다'가 된다. 뭐가? 바로 이름을 붙이기
전의 그 무엇(도)이나 (도라고)이름 붙인 그 무엇은 사람이 뭐라던 간에 검기는 마찬
가지니 똑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현지우현(玄之又玄)'은 '이놈도 검고 저놈도
검다'라 는 말이다. 앞의 현(玄)은 묘(妙)의 성질이고 뒤의 우현(又玄)은 요(僥)의 성
질이다.
'이름을 붙이지 않고 묘를 보거나, 굳이 이름을 붙여서 요를 보거나 간에 이 두 가
지가 검기는 마찬가지고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 같이 검어서 양자는 결국 같다'는 설
명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뭐냐? 자기가 지금 '도(道)'라고 이름을 붙
여서 뭔가를 설명을 하려고 하는데, 그것의 이름을 편의상 '도'라고 붙이긴 했지만
그 이름에 신경쓰지 말자는 소리다. 그 이름이 도이건 다른 무엇이건 굳이 도라고
이름을 붙이고 보던 이름 없이 보건 그것이 검기는 마찬가지고 이리 봐도 검고 저리
봐도 검은 놈이니 검은 것만 보면 되지 이름이 무슨 상관이냐?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다음에 노자가 하고 싶은 말, 즉 결론이 나온다.
衆妙之門 (중묘지문)
'이름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름을 붙이던 안 붙이던 묘를 보건 요를 보건 자기가 지금
도라고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모든 묘한 것이 나오는 문이다' 이런 말이다. 제1장의
중심어는 명(名)이고, 결론은 '도이중묘지문(道以衆妙之門)'이다. '도는 모든 오묘함이
나오는 문이니라. <도덕경>의 서두를 꺼내 혹시나 사람들이 '도(道)'라는 이름에 사로
잡힐까봐 노파심으로 서두에 못을 박아두는 것이다.